2008년 11월 30일 일요일

지하철 #1


언젠가 한겨레 신문의 입사 시험 중 작문 시험 결과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다. 작문 시험의 주제는 "새벽"이었는데 실제 내가 기억하는 단어는 "지하철" 이다. 다시 찾아보니 해당 글이 있어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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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자채용 작문시험 채점표를 공개합니다 200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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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형 인간인 덕에 새벽과 친한 편입니다. 더구나 밥벌이 수단을 구하는 장도의 길에 나선 뒤, 새벽과의 만남은 더욱 잦아졌고요. 하여 종종 새벽의 첫 지하철을 타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 첫 지하철이란 걸 타던 날, 새벽공기가 몰고온 추위를 좌석의 뜨뜻함으로 날려버릴 달콤한 생각을 하고 기다리는데, 이게 웬 걸. 빈 자리는 없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얼마나 일찍 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선점한 상태였으니까요. 새벽의 실종을 직감하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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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하니 이 글이 떠오른 이유는 위에서 묘사한 지하철의 모습이 그 당시, 2006년도 말의 실제 나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종된 새벽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

2007년 4월 enswer.me를 창업하기 전 2006년은 나에게 있어서 고난의 시기였다. 친구와 같이 창업했던 이전 회사(SL2)가 상황이 안좋아 지면서 나는 새로운 진로를 고민했야 했다. 진로 뿐 아니라 빚도 지고 있었다. SL2가 자금이 부족해 지면서 2005년에 증자를 하게 됬고 거기에 개인 돈을 더 투입했던 것이다. 다 합쳐서 6000만원 정도 되었던 그 돈은 빌라에서 아파트로 전세를 옮기기 위해 내가 저축해 두었던 것과 아버지가 동생 결혼을 위해 우체국에 들어두었던 적금, 그리고 처가집에서 10년도 더 된 장인어른의 차를 바꾸려고 모아 두었던 것을 합한 것이었다. 

하지만 증자 후 SL2는 돈을 벌지 못하고 회사가 힘들어졌고, 나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만 했다. 내 개인의 진로를 떠나서 6000만원의 돈을 만회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 식구 전세값이야 아파트를 잊어 버리고 계속 빌라에 살면 된다고 치면 되지만, 처가집과 부모님 돈은 어쩌란 말안가. 개인적으로 처절했다. 당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던 동생에게 했던 '요즘은 30넘어서 결혼하는게 대세'라는 농담도 속으로 절반은 진심이었다.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는 최대한 연봉을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해서 몇년간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법. 둘째는 처가집과 본가에 돈을 못갚겠다고 손들어 버리고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를 다시 하는 것. 셋째는 프리랜서, 개인사업을 통해 최대한 열심히 몸을 팔아 돈을 벌어 충당하는 대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첫번째는 싫었다. 조직에 들어가는 것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도 무언가 나를 구속시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두번째와 세번째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처가집과 본가에 빌린돈의 상환을 늦출수 있었고, 프리랜서 생활은 잘만하면 자유롭게 돈을 벌수도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모아니면 도'의 배수진을 쳤다기 보다는 '이게 안되면 저거라도 되겠지'라는 얍삽합이었다.

공부를 다시하기 위해서 KAIST에 박사 시험을 치렀고 다행히도 예전에 알던 교수님들 덕분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대신 조건은 내가 등록금을 낸다는 것 (산학 - 학부는 등록금을 본인이 내지만 대학원은 특히 공대는 국비장학생이나 연구실에서 등록금은 내준다). 거기에다 결혼을 했다는 핑계로 주중에는 홍릉에 있는 서울 KAIST에서 수업을 듣고 주말에만 대전에 내려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결국 내게 남은 일은 어떻게 하면 주중에 최대한 많은 돈을 벌수 있을까였다. 

그런데 정말 우연치 않게도 망한 회사 SL2때의 경험이 도움이 됬다. SL2때 했던 제품 중에 음성인식 홈네트워크 제품이 있었다. 집밖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불다꺼"라고 외치면 불이 다꺼지는 어찌보면 신기한데 실용성은 떨어지는 100만원짜리 장난감이라고나 할까. 이 제품의 운영체제는 Window긴 한데 PC용이 아닌 임베디드용 Windows CE였다. 범용 OS가 아니라서 H/W와 연동을 해주는 디바이스 드라이버를 구입할 수 없었기에 내가 직접 이를 제작했었다. 그 결과를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고 이것을 보고 연락이 왔다. SKT T-Login (노트북에 꽂으면 어디에서나 인터넷이 되는 모뎀)을 Windows CE 기반의 네비게이션에 붙여줄 수 있겠냐는 요구였다. 

디바이스 드라이버는 여느 응용 프로그램과 달리 OS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잘못되면 시스템이 다운되어 버리는 좀 특이한 분야다. PC와 달리 다운되면 제품의 하자로 생각되기 때문에 Embedded 시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쪽은 생각보다 잘 하는 사람이 없는 틈새시장이었고 나는 이미 한번 경험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이 프로젝트 하나로 2달만에 SL2때 빚의 1/3을 갚을 수 있었다.  

첫번째 프로젝트 이후 2~3번의 프로젝트를 더했다. 2005년 12월 31일, 남들은 다들 집에서 TV로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때 나는 안양 공설운동장 옆에 있던 협력업체 지하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고 평촌역의 한 사우나에서 눈을 부쳤지만, 정말 재밌었다. 돈을 번다는게 이런거구나. 비록 나는 오늘 같은 날 혼자 밤을 새서 일하지만 1~2달만 열심히 하면 남들이 6개월 일한 월급을 벌 수 있다는 것. 추웠지만 그때의 희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틈새 시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Windows CE 시장이 커지면서 Chipmaker에서 Chip과 동시에 Device Driver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는 일거리가 없어 굶어야 했다. 출근안하고도 1~2개월만에 6개월치 돈을 벌 수 있는 짭짤한 일거리는 떨어졌다. 거기에다 결혼 4년만에 와이프의 배가 불러왔기에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계약직 프리랜서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국 SUN 명함을 파고 6개월 동안 매일 출퇴근한다는 조건으로 SKT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이 때가 2006년 8월부터 2007년 1월까지의 시간이었다. 이것은 말이 개인사업이지 실상은 월급쟁이보다 더 않좋았다. '갑'이 퇴근하기 전에는 절대 먼저 퇴근할 수 없었고, 하다못해 SK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는 바람에 경기가 있는 날은 SKT 직원들이 인천에서 응원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올때까지 미팅을 위해 기다려야 했다. 이 때 내린 결론은 무언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끊기지 않는 사업을 해야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업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것 즉 나만이 할 수 있는것. 남들이 하더라도 적어도 1년 이상은 격차를 벌릴 수 있는것.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 1년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것. 도대체 그 길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때의 나에게 길을 제시해 준 공간이 바로 지하철이었다. 새벽의 실종처럼 비전도 없었고 단지 삶의 짐을 위해서 나가야만 했던 어찌보면 암울했던 시기였지만 지하철을 통해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써놓고 보니 우울한데 #2는 나름 즐거운 분위기를 기약하며 ^^

2008년 9월 14일 일요일

컴퓨터 공학 - Computer Science?

나의 전공의 컴퓨터공학이다. 초등학교때 아버님이 IBM 호환으로 한국에서 처음 나온 8086 컴퓨터를 집에 가져다 놓았을때 나의 진로는 바로 결정되었다. GUI도 없이 A:>_ 프롵프트만이 유일한 인터페이스였다. 10장이 넘는 플로피 디스크를 바꿔주어야만 "Indiana Jones"라는 어드벤처 게임을 할 수 있었지만, '_' 의 커서가 깜빡거리는 8086 컴퓨터는 하나의 생명체였고 나에게는 둘도없는 친구였다. 그 후 컴퓨터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 국영수 과외가 아닌 컴퓨터 학원도 다녔고, 고3때 담임선생님과 대학 진학상담으로 학과를 정할때는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단지 컴퓨터가 좋았을 뿐.

 

"컴퓨터가 좋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 시점은 대학원에 진학할 때였다. 20개가 넘는 연구실이 있었고, 그곳마다 국내 최고의 교수님이 계셨다. 학교에서는 Lab Tour (랩돌이)라는 이름으로 신입생들에게 모든 연구실을 소개해주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부푼 꿈을 안고 정말 열심히 Lab Tour에 참여했다. 한국 제일의 교수님과 최고의 인재인 선배님들을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랩돌이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연구실의 이름은 이랬다. SE Lab, Network Lab, DB Lab, TC Lab, ... 이름은 멋있지만 실제는 별거 아니다. 결국 컴퓨터는 100년전에는 없었던 물건이고, 우리 모두는 컴퓨터가 없어도 사는 것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결국 20개의 연구실에서 내가 갈곳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조금은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컴퓨터 공학"이란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결론은 순수학문은 아니라는 것. 컴퓨터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름 선택한 분야는 인공지능이었다. 그나마 가장 순수학문과 가깝고 미결과제가 많은 곳이니까. 검색, 언어처리, 음성인식, 얼굴인식 등은 아직도 해결해야할 과제가 널려 있다. 잘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꿈은 아직 진행형이다. 공대 출신으로서의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 ->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자."


 이것은 인문,사회학도들이 20세기에 꿈꿔왔던 제도를 통한 혁명과는 다르다. 단지 내가 연구한 분야, 기술을 통해 사람들이 편리함을 느끼고 이를 통해 Life-Style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좀 거창하게 꿈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있어 보여서 좋다. 개인적으로도 힘이 되고  :-)